누군가가 읽어온 책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려진다. 어떤 책 앞에 멈추고, 어떤 문장에 머무르는지가 그가 세계를 어떻게 감각하는지 비춘다.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읽고 있는 것. 그런 점에서 독서란 한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Books의 새 기획 ‘The Reader’는 문인을 포함한 사회 각 분야 명사들을 만나 책에 대해 묻는다. 지금 머리맡에 있는 책은 무엇인지, 읽지 않은 걸 후회하는 책은 없는지, 어떤 책이 나를 바꿨는지…. 꼬리를 무는 질문들은 하나로 귀결된다. “당신은 어떻게 ‘읽는 사람’이 되었나요?”



소설가 정대건을 경기 고양시립 화정도서관에서 만났다. 그가 소설을 쓸 때 찾는 공간 중 하나다. 손에 든 책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는 도스토옙스키를 가장 위대한 소설가라고 생각한다./조인원 기자


“제목 따라간다”는 속설이 가수에게만 적용되는 건 아닌 듯하다. 소설가 정대건(39)은 작년과 올해 출판계에 ‘급류’를 일으켰다. 2022년 출간된 급류(민음사)는 누적 판매 부수 30만 부 중 27만 부가 최근 1년 사이 팔리며 ‘역주행’ 대표작 중 하나가 됐다. 예스24에 따르면 올해 판매량(1~10월)이 전년 동기 대비 492%다. 다섯 배 가까이 팔린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강 작품이 출판 시장을 휩쓴 중에도 한국 장편소설 판매 순위 다섯 손가락 안에서 벗어나지 않은 작가다. 어린 시절 아픈 첫사랑이 끓어 넘치며, 때론 너절해지며 이어질 듯 말 듯한 사랑 이야기에 10~20대 독자들이 열광했다. 여러 명이서 돌려 읽는 ‘교환 독서’ 열풍까지 일으켰다.
그의 인물들은 자꾸만 돌아간다. 등단작 ‘GV빌런 고태경’(은행나무)부터 ‘급류’까지 어딘가에 닿기 위해선 꼭 다시 만나야 한다. 최근 경기 고양시립 화정도서관에서 그를 만나 물었다. “당신은 어떤 책을 읽고 그런 사랑을 썼나요.” 소설가 이전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던 그는 소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와 영화 ‘비포 선셋’이라고 답했다. “저는 로맨틱 코미디처럼 ‘오해를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걸 믿지 못해요. 풍파를 겪으며 돌고 돌아, 몇 년이 지나서도 무언가 이어지는 사랑을 신뢰하는 것 같아요. 해소되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재회해야만 하는 거죠.”
-‘급류’ 역주행의 소감은? 왜 1020이 열광할까.
“책을 읽기 어려워하는 시대다. 그래서 “3시간 만에 읽었어” 같은 반응을 크게 생각하는 것 같다. 몰입해서 완독하는 경험을 의미 있게 여기는 것이다. 책 속 중요한 장면이 10대 시절 이야기다 보니 이입이 잘되는 것 같기도 하다. 내 또래와 소통한다 생각하며 썼는데 10대의 마음에 들 줄은 전혀 몰랐다. 반면 뜨거운 사랑의 시기를 지나 보낸 4050에겐 다 타고 남은 것들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현대인은 바빠서 책을 못 읽는다는데.
“시간보단 관심을 뺏는 게 너무 많아 문제다. 다만 독서에 당위를 내세우는 것보다 친숙함이 먼저일 것 같다. ‘교양을 위해서’ 같은 압박이 없었으면 한다. 흥미 위주여도 좋다. 독서의 즐거움을 한번 느껴보면 스스로 찾아 읽는다. 마치 독립영화처럼. ‘첫 번째 즐거움’을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지금 침대 옆엔 어떤 책이 있나.
“에세이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아티초크)가 있다. 저자 윌리엄 해즐릿은 18~19세기 영국의 표독스러운 에세이스트다. 정치적 올바름을 말하는 요즘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한다. 괴팍한 사람이라 말년엔 외롭게 지냈다. 그런 상충 작용이 책을 재밌게 만드는 것 같다.”
-독서 취향은?
“소설처럼 이야기가 있는 걸 즐긴다. 특히 괴팍한 인물이 나오는 게 좋다. 인물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이해받는 느낌이 좋다. 모두 사회화된 가면 뒤에 울퉁불퉁한 면이 있지 않나. 소설은 특히 영화보다 내면의 목소리를 많이 담는다. 그런 솔직한 이야기의 쾌감이 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어머니가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시작하는 것처럼.”
-어떤 소설가를 가장 좋아하나.
“도스토옙스키. 가장 위대한 소설가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철학적 질문을 장황한 대사로 풀어내는 게 아니라 범죄 서사에 재밌게 녹여낸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고민을 함께하게 만드는 대가다.”
-선호하는 장르와 피하는 장르는?
“사회파 추리소설에 관심 있다. 범죄로 사회의 병폐를 들여다보는 소설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은행나무)처럼. 범죄라는 특수성으로 일상에선 보기 힘든 내면의 극한 상황을 깊게 다루는 게 좋다. SF는 잘 안 읽힌다. 내가 상상력이 발달하지 않은 것 같다. 현실에 기댄 이야기가 잘 와닿는다.”



소설가 정대건./조인원 기자


-어릴 적엔 어땠나.
“10대까진 책과 영화를 잘 안 봤다. 주변에 만화·비디오 가게에서 ‘드래곤볼’ 같은 소년만화나 ‘드래곤라자’ 같은 판타지를 많이 봤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책과 영화에 폭발적으로 빠져들었다.”
-대학 땐 어떻게 빠지게 됐나.
“나는 고민과 사색을 많이 하는 사춘기를 보냈다. 철학과에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내 안의 수많은 생각을 해결해줄 것 같았다. 막상 진학해 보니 딱딱하고 수학적인 학문이더라. 그때 알았다. 내 고민은 철학이 아니라 문학적 고민이었구나.”
-문학적 고민이라니?
“나는 참 심각한 아이였다. 10대 땐 괴팍하다는 소리도 자주 들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접했을 때 나를 설명해 주는 듯한 위로를 받고 빨려 들어갔다. 문학은 인물의 구체적인 맥락과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있다. 인물이 겪는 두꺼운 서사 속에서 내 모습이 잘 보였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선 유머의 중요성도 배웠다.”
-영화와 문학은 다르지 않나.
“문학은 좀 더 생생하게 작가와 독자가 소통하는 매체 같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내밀하게 주고받는 편지랄까. 영화는 짧은 시간에 강력한 몰입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한때 살았던 전생처럼 느껴지게. 책을 읽는 건 영화보다 좀 더 능동적이고 에너지가 든다는 생각도 든다.”
-스티븐 킹은 제인 오스틴과 윌리엄 포크너를 읽어보지 않았다고 한 적 있다. 당신은?
“조지 오웰을 읽지 않았다. SF에 친숙하지 않아서인 것도 같다. 물론 ‘동물농장’은 다르겠지만. 사실 나도 윌리엄 포크너를 안 읽었다. 이야기를 쓸 땐 다른 이야기가 잘 안 들어오는 점도 있다. 오히려 논픽션이 더 잘 읽힌다.”
-쓴 책 중 가장 의미 있는 책은?
“첫 에세이 ‘나의 파란, 나폴리’(안온북스). 사람은 정말 바뀌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문제와 평생 씨름하면서 산다. 나폴리에 다녀오고 작가로서의 여정이 변화했던 경험을 담았다. 무언가에 신음하는 분들에게 숨통이 됐으면 하는 책이다.”
-다음엔 무슨 책과 영화를 볼 건가.
“‘고립의 시대’(웅진지식하우스)와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주인’. 고립의 시대는 우연히 제목에 끌려 목차를 봤다. 관계의 단절이나 외로움에 관심이 많다. 데이터도 풍부해 보였다. 세계의 주인은 오로지 윤가은 감독에 대한 신뢰와 팬심 때문이다. 이번엔 일부러 영화에 대한 정보를 많이 노출시키지 않은 것 같아 더 궁금하다.”



정대건의 PICK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던 건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창비). 영국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저자가 어느 날 주변에 남성 친구가 없음을 깨닫는다. 남자는 여성보다 연약한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잘 모르지 않나. 남자끼리 소리 지르며 축구 응원은 잘하는데 다정한 대화는 어색해하는 것처럼. 저자도 결혼할 파트너에게만 마음속 깊은 고민을 털어놓더라. 우리나라 얘기 같고 유쾌하다. ‘남성성’을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 경쟁을 풀어낸다. 부제도 좋더라. ‘어느새 인간관계가 고장 난 사람들에 대하여.’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위대한 개츠비’(민음사). 김욱동 선생님이 번역한 버전을 읽는다. 20대 땐 개츠비의 낭만이 좋았다. 불가능한 모든 것을 끝없이 추구하는 모습 같은 것. 이젠 책 속 개츠비보다 나이가 많아졌다. 데이지에게 “톰을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고 말해”라고 하는 게 어리게 느껴지기도 한다. 데이지를 정말 사랑한 게 아니라 그녀에게 투영된 어떤 이상에 사로잡혔던 건 아닐까?
♦책은 어떻게 고르나
=독서 팟캐스트나 유튜브를 통해.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고 주로 집에 있어서 그러는 것 같다. 작가나 편집자가 추천하는 책들을 보며 흥미가 가는 걸 메모한다. 그런데 책 읽기보다 리스트가 쌓이는 속도가 빠르다.